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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펌) 지지봄봄 대담_ 수업혁명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하여

    • 작성자북구문화의집
    • 등록일17.10.13
    • 조회수945
  • 수업혁명’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하여 

    일시 : 2017.07.10. (월)
    장소 : 서울역 상상캔버스
    진행 : 고영직(문학평론가)
    참석자
     - 김경옥(대안공간 민들레 대표)
     - 백용성(철학자, 문화기획자)
     - 오명숙(새롭게 보는 박물관 학교 대표)
     - 정민룡(광주북구문화의집 관장)
     - 최지원(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지지봄봄》담당자)
     - 김은기(녹취)
     - 권하형(사진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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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직  

     

     이번 호 《지지봄봄》 발행과 관련하여 앞서 차재근, 정연희 선생님 두 분 모시고 문화예술교육 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좌담은 문화예술교육정책에 대한 거대 담론에 대한 이야기도 있겠지만, 그보다 실질적으로 교육 현장에서의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어떻게 수업혁명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각자의 경험에 근거해 이야기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먼저 정민룡 선생님께서 짧은 발제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정민룡 

     

     이 자리는 정책 이야기를 하는 자리는 아니기 때문에, 현장에서 느꼈던 어려움과 더불어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현재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다양한 비판들이 있습니다. 중앙정부 ‘택배사업’이란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에 대해 진단하는 것은 생략하고 앞으로 ‘이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렇게 하면 재미없겠다’ 하는 것을 위주로 말하는 것이고, ‘어떻게 할까’는 부분은 저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좀 다를 것 같습니다. 정책 담당자들도 다르고, 현장에 있는 분들도 각자 수업 현장에서 보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저의 고민에 근거해서 말하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문화예술교육을 이야기할 때 자기 선명성이나 정체성, 고유성에 대한 이야기로 접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 옷에 맞추려고 노력하다보니 방향성 자체가 흐트러지는 것 같습니다. 일단은 그 논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문화예술교육이 뭐다’는 식의 정의내리기는 멈췄으면 합니다. 대신에 문화예술교육이 학생이나 성인이나 각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삶의 촉진제가 되는가, 어떤 인상을 주고 있는가, 그리고 좀 넓게 봤을 때 어떤 경험치를 주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문학적, 철학적 지점을 전달해주는 것도 중요한데, 저는 문화예술교육이 ‘실용적(實用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하고 싶은 문화예술교육입니다. 예전에 ‘실과(實科)’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문화예술교육이 그와 같은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로부터 가치와 철학이 도출되고, 실생활에서 쓸모 있는 것들을 만들어가는 것에서부터 문화예술교육이 출발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관점에서 이야기해보면 다양한 주제들이 도출됩니다. 장르 중심 교육은 지양해야 한다는 것과, 학교문화예술교육의 측면에서는 더 이상 사회가 학교를 위해 특정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학교가 사회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지금까지는 학교에서 사회에 ‘이렇게 해 달라’는 러브콜을 끊임없이 보내는 상황이었는데, 반대로 학교도 사회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고 그것이 가능한 분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커리큘럼은 연구를 통해 만든 체계와 시스템이기에 공교육에서 활용 가능한 부분이고, 사회문화예술교육에서는 커리큘럼이 없었으면 합니다. 일부 필요한 부분도 있겠지만, 단호하게 없앴으면 좋겠습니다. 강사와 학생으로 고정된 역할 설정도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강사와 학생이 서로 대화하고 소통해야 하고 서로 잘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현이 잘 안 되고 있습니다. 좀 더 강하게 이야기하자면, 강사란 표현 자체가 문화예술교육에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방적 티칭과는 다른 코칭이나 배움에 대한 이야기들도 나오고 있는데, 이러한 패러다임에 맞춰 강사, 학생의 역할 설정도 변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육 장소와 환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활용하고 있는 교육 환경 중 배움이 있는 것은 그 중 1%도 안 된다고 봅니다. 나머지 99%의 좋은 환경을 배움이 일어나는 공간으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움직임을 한마디로 하면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문화예술교육의 개념이 확장되어 문화예술교육이라는 존재나 이름, 틀 자체를 지우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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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과(實科)를 배우는 ‘마을예술학교’

    고영직 

     

     엄숙하거나 거룩한 이야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과’라는 표현을 하셨는데, 정민룡 선생님이 자주 쓰시는 표현으로 번역하면 이는 ‘삶의 기술’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정민룡 선생님께서 11년 동안 광주 지역에서 문화예술교육 활동을 해오시며 느꼈던 구체적인 내용들을 덧붙여 이야기하면 논의가 더 풍성해질 것 같습니다. 지난 5월 광주문화예술교육센터가 주관한 정책포럼에서 이제는 프로그램 위주의 정책사업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염탐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하셨는데, 거기에 대한 논의를 덧붙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정민룡  

     

     앞에서 99%의 좋은 환경이라는 부분을 말했습니다. 저는 교육의 원료나 수단, 원천이 되는 자원은 우리 주변에 너무 많고, 많이 봐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교육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배움의 자원’ 자체를 바라보지 못하는 시야의 한계이지 자원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다고 생각하고 배움이 촉진될 수 있도록 만들어내는 공간이 제가 생각했던 ‘마을예술학교’입니다. 마을에서, 학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배움이 작용되는 것을 찾고 하나로 결집시켜 만들어져야 하고, 이러한 움직임들이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학생과 선생님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 것에 대해 추가로 설명하자면, 당연히 선생님의 자격 요건부터 없애야 합니다. ‘아무나’ 선생님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예술강사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것들과 같은 자격을 두면 마을에는 당연히 수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지죠. 마을에는 살아가면서 터득하는 삶의 경험치가 높은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선생님이 되어 직접 가르쳐 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배움의 계기를 제공하는 든든한 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마을 단위에서 일어난다면 제가 말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공교육을 완전히 배제한 채 대안교육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금만 시간을 내어 그것을 10년 이상 지속하면 생활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실제로 저는 그런 경우를 보았습니다.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학교에서 예술교육을 경험하는 친구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마을예술학교의 10년은 다른 경험치를 만들어 줍니다. 최근 담양군 수북면에서 박문종 화가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과 함께 <2017 모내기 퍼포먼스>를 진행했는데, 모내기 활동을 하는 이유는 농사를 잘 짓자는 게 아니라 경험을 주자는 겁니다. 예술가의 좋은 작업실이 있는 마을은 그 자체가 마을예술학교가 될 수 있고요. 이러한 접근으로 지역을 바라보자면 자기 동네에 소상공인이 많은 곳이 있으면 아이들이 기술, 실과를 배우거나 경험할 수 있게 해주면 됩니다. 용접도 시켜보고, 자동차도 분해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마을 단위로 이루어지면, 한 지역에 많은 마을학교가 생기고, 아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거기서 놀고, 그것이 10년 이상 지속되면 무언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교육과 더불어 가는, 방과 후 학교 같은 개념일 수 있겠죠. 학교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죠. 물론 현실적 문제는 있습니다. 어려움은 있겠지만 방과 후 학교 개념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영직  

     

     정민룡 선생님은 지난 6월 10일 광주 북구문화의집에서 마을예술학교의 형식으로 운영하는 <땅과 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한 아이들 및 학부모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 더불어 모내기를 하며 같이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는 활동을 하셨습니다. 이런 활동에는 지금의 정책사업, 그러니까 프로그램 중심의 지원사업에서는 절대 풀 수 없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다른 유형의 지원정책의 트랙이 필요하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원사업을 직접 하고 계시는 최지원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마을예술학교의 적(敵)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최지원 

     

     문화예술교육이 10년 정도 지나서 양적 확대는 되고 있지만 새로운 시도나 나름의 고민을 가진 사람은 빠져나가고 지원사업 중심으로 문화예술교육 생태계가 정리되고 있는 것 같아 두렵게 느껴집니다. 지원사업 안에서 새로운 것들을 자유롭게 시도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기 때문에 문화예술교육을 사업의 형태로 실행하려는 사람들 중심으로 모이고, 다른 움직임이나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려는 사람들에게 지원사업은 경직되고 재미도 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고요. 지원사업 담당자로서 가능한 틀 안에서 어떻게든 유의미한 무언가를 만들어가려고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사업 너머의 활동을 함께 고민하는 동료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이 부분이 한계로 느껴집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서로 소모되지 않는 지원사업의 구조적 개선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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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명숙  

     

     정민룡 선생님이 발제해 주신 것처럼 현장과 지역으로, 그리고 오래된 경험을 나누는 방식으로 문화예술교육이 바뀌어야 합니다. 획일화된 자격 기준을 가진 분들이 아이들과 만나는 게 아니라 삶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이것을 공유하는 차원에서 문화예술교육이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말씀에 저도 공감합니다. 두 가지의 문제점을 던져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해왔음에도 표준화되고 도전하는 노력이 부족한 것 같다는 점, 또 하나는 지역 안에서의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것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하는 부분인데요. 
    저는 오랫동안 박물관 교육, 인문학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데요, 교육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왔습니다. 더군다나 박물관 교육은 ‘역사’라는 과거의 큰 흐름과 현재를 살아가는 아이들을 만나게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 지향적인 측면도 있지요. 미술관도 박물관이 될 수 있고, 문화예술교육 현장도 일종의 박물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네트워크가 중요한데,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프로그램의 표준화, 경직화와 교사들이 적극적으로 가르치려는 논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좋은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사는 좋은 질문을 던져주는 사람이고, 질문은 우리의 존재를 일깨우기 위해 필요합니다. 존재를 위한 학습이어야 하고, 각자의 존재가 가지고 있는 가치가 드러나게 해주는 것이 문화예술입니다. 왜 사는지, 본질이 뭔지 묻는 지점이 있을 때 서로 협력할 수 있고, 양보할 수 있고, 도울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작년과 올해 박물관, 미술관 쪽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데요, 박물관은 지식을 ‘주입’해야 한다는 생각을 정말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지식은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이걸 왜 굳이 여기서 가르치고 있지?’라는 반문이 들었습니다. 지식을 전수하려 하지 말고,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도록 하는 ‘질문’과 ‘만남’이 필요하고, 선생님들도 자기 경험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준비된 텍스트가 견고할수록 이런 현상은 더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박물관 학예의 핵심은 의미의 재구성인데, 그것을 알고 있더라도 구체적으로 수업에 어떻게 풀어낼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정민룡 

     

     박물관 교육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의 교육도 마찬가지인데, 강사에게 물어보면 ‘우리는 지식전달 교육이 아니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 프로그램을 보면 강사는 계속 지식을 전달하려고 하고, 아이들은 수업에 참여하려는 의지가 없는 경우를 봅니다. “지식을 전달하시냐?”고 물으면 기분 나빠하시며 ‘아니다’라고 하고요.

    오명숙 

     

     좋은 문제제기입니다. 교사가 자기 성찰의 지점이 없고 커리큘럼에 맞춰서 도입-전개-설문 같은 획일화된 과정에 따라 수업을 진행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틀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합니다. 올해 모니터링 현장에 가기 전에 어떻게 도움을 드릴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니터링은 물론 저에게도 학습이 되지만 여러 가지 고민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좋은 수업을 한다는 평가를 받는 단체들에게 물어보니, 담당자가 “수업하고 나면 계속 교사들과 피드백을 주고받아요. 비디오로 수업을 찍고 계속 논의를 하고 그 구조가 있으니 수업이 향상됩니다”라는 대답을 합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업을 공유하고 논의하는 것, 좋은 이야기든 부족하거나 잘된 이야기든 계속 함께 논의한다면 더 나은 지점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단 한 번도 되어본 적이 없는 자기가 되는 삶”
    _ 티칭에서 러닝의 문화로 

    고영직 

     

     두 분께서 말씀하신 것은 문화예술교육에서 ‘교사는 누구인가? 가르치는 사람인가 안내하는 사람인가?’ 하는 지점에 대해 이야기해 주신 것 같습니다. 지금의 문화예술교육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이루어지려면 먼저 선생님들이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문제인식이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정민룡 

     

     저는 이런 생각이 위험한 덫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어디로부터 왔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사실 선생님들은 다 생각하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은연중에 잘 가르쳐야 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야 수업이 매끄럽게 진행되기 때문이죠. 저는 이것이 덫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패러다임 전환의 측면에서 해결해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덫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정책사업은 매끄럽게 진행 되지 않으면 큰일이 나니까요. 배움이 일어나도록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것에 관심은 있지만 어떻게 하는지 모르니까 티칭(teaching)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교육 서비스가 이루어지고요.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배웠냐?”고 물어보고, 뭐 하나라도 만들어 와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을 서비스로 인식을 하니까 교사는 두 시간 안에 무언가를 해 주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같은 문제가 지속됩니다. 그래서 교사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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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용성 

     

     전체적으로 패러다임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요, ‘티칭/코칭/러닝’ 등 좋은 키워드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현실 속에서 교사 주체의 문제인지, 환경의 문제인지, 복합적 요인은 있겠지만 저의 고민은 ‘러닝의 문화’가 많이 필요하고, 이것이 자리를 잡아가는 패러다임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좁은 차원에서의 문화예술교육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인 판세형성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 Homo economicus)가 되어라, 자기를 관리하라, 자기계발이 필요하다, 등의 얘기가 강조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게 문제인 거죠. 노동을 위한 도구적 기능으로 빠지는 겁니다. 그런데 한 편 평균 수명도 길어져 인생 이모작이라는 말도 있지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단 한 번도 되어본 적이 없는 자기가 되는 삶”, 이 말은 미셸 푸코가 한 말인데요, 그리스·로마에서 사람들이 이미 했던 실천으로 일종의 자기배려, 수양을 의미합니다. 일종의 ‘러닝의 문화’ 즉 ‘배움의 문화’인거죠. 그런데 동아시아에도 이런 전통은 많습니다. 선비가 자기를 갈고 닦는 수행도 그렇지요. 
     그런데 이것이 어느 순간 사라졌습니다. 푸코가 제기한 것이 서구 사회에서 이런 실천들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배움의 문화를 기반으로 한 교육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문제는 단순히 꿈다락 토요문화학교를 어떻게 할까 이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더 중요한 화두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내기라든가, 실과, 수작(手作, 손쓰기)을 많이 해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추상적인 것보다 잡히는 것을 직접 해보는 것인데, 그런 것도 전체적인 배움의 문화와 연관이 되었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도구적 기능주의로 갈 수도 있습니다. 
     앞서 스승-제자 관계, 강사, 소통, 평등, 주체화, 이런 이야기도 많이 나왔는데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이 되어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야하고, 또 알게 모르게 가고 있는 부분도 있다고 봅니다. 정책도 필요하지만 이러한 자발적 움직임들을 발굴하고 논의를 확산시키며 만들어가는 부분이 필요합니다. 모내기를 했을 때 교육적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교육 과정으로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마을 만들기 같은 프로젝트들이 많은데 전체적으로 어우러져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을 공동체 속에서 진행하는 윤리적 행위를 통해 파토스(pathos) 즉 새로운 감수성의 형성, 에토스(ethos) 즉 공동관계의 구성 같은 경험의 긍정적 부분이 새롭게 조명되고 공부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게 작게는 일상과 넓게는 삶과 분리되지 않은 ‘배움’의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김경옥 

     

     이런 좌담이나 토론을 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대상 또는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소재, 자원 등을 표현하는 언어들에 대한 이해도가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나눠보고 싶은 것은, 문화예술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급진적(radical)이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고, 교육은 그 본질 자체가 보수적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갖춰야 할 것들을 어떤 형태로든 후세(後世)에 전하는 것이 교육이라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잘 전할 수 있을까’가 가르침의 방식일 수도, 배움의 방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다’라고 본다면, 가장 급진적인 것과 가장 보수적인 것, 이 두 가지가 만났을 때, 어디에 방점을 찍을 것인지, 과연 문화예술이라는 새로운 영역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정책적인 기대도 있고, 또는 문화예술교육을 하고 있는 사람이 기대하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교육자가 기대하는 것, 철학자가 기대하는 것이 다 다를 텐데요, 우리 사회는 무엇을 기대하기에 돈과 사람을 쓰는 것인지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고영직  

     

     네, 김경옥 선생님께서는 다른 분들과 포지션이 달라서 모신 것이니 선생님이 계신 현장 이야기를 해주시면 큰 도움이 될 듯합니다. 

    김경옥  

     

     제가 있는 <오디세이학교>는 학교 밖 현장입니다. 그래서 교육을 하고 있지만, 실제 현장의 성격은 대단히 급진적입니다. 기존의 시스템과 상관없이 모든 것을 해볼 수 있습니다. 2001년부터 시작해서 거의 20년 가까이 다양한 시도를 해왔습니다. 
     그동안의 교육은 저마다 다 다른 사람을 하나의 기준으로 이야기하고 평가하고 줄 세우기 하는, 얼토당토않은 것이 교육이란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달리기에서 100m를 몇 초 안에 뛰는 것이 기준이고, 거기에 맞추는 게 제도권의 학교라면 거기서 잘 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소외되는 아이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왜 소외되어야 하는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보면, 인류라는 종(種)으로 묶이는 이들을 하나로 성장시키는 촉매는 문화 예술적 자극이지만 학교는 이러한 관점으로 아이들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토대가 되어주는 것은 문화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예술이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삶의 토대를 만들어 가는데 자양분이 되도록 저희는 애를 써왔습니다. 
     모내기 이야기도 하셨는데, 저희도 지리산에 가서 손 모내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일상 자체를 어떻게 문화예술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가 교육 현장을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일차적 고민입니다. 공간의 세팅, 디자인도 문화예술적 감수성을 가지고 접근하고요. 그 다음에는 한 주간(週刊, week)의 ‘흐름’이 어떠할 때 문화예술적으로 몸과 마음이 열려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있을까, 하루의 흐름은 어떻게 되면 좋을까를 고민하며 일 년, 일주일, 하루의 흐름을 만들고 공간을 구성했습니다. 교육 과정을 구성할 때도 문화예술적 요소를 어떻게 도입해서 적용할까를 고민하는 것이 저희의 1년 설계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본 설계를 바탕으로 다양한 분들을 초대합니다. 무용하는 분들을 초대하기도 하고, 박물관에 가기도 하죠. 하나의 큰 흐름 속에서 다양한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투입하여 일관된 흐름과 자극이 주어지는 맥락을 만듭니다. 이것은 시스템 밖에 있는 교육 현장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스템 안에서도 이렇게 설계되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과연 이게 가능할까 라는 생각도 합니다. 제도 학교도 이런 흐름 속에서 교육을 설계하고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것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시도한 것이 서울시 교육청이 주관하는 일 년제 학교인 <오디세이학교>입니다. 
     문화예술교육이 우리의 전체 시간의 흐름, 정서적 흐름, 인지적 흐름, 관계의 흐름에서 따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 되어 움직여야 하는데 이것이 제도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지기 어렵다면 어느 정도 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제는 실천 방안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오명숙  

     

     <오디세이학교>가 꿈다락 토요문화학교나 센터에서 하는 지원사업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어떤 점을 공유해서 발전적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들었습니다. 제안을 하자면 커리큘럼을 만들어 놓고 아이들을 모집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할 아이들을 모집해서 그때부터 커리큘럼을 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원사업 안에서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런 도발과 협력을 연대해서 한다면 좋지 않을까요. 또 하나, 박물관의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참여박물관(the Participatory Museum)’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시민들이 오면 그때부터 무엇을 할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자유롭게 나오게 됩니다. 화학적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죠. 

    정민룡  

     

     실질적으로 현장에서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아이들은 커리큘럼을 보고 수업에 오는 것이 아니거든요. 커리큘럼은 가르치는 사람의 자기계획입니다. 물론 지식 중심 교육은 그것을 봐야겠지만 대부분의 예술교육은 커리큘럼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명숙 선생님 말씀은 현실화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작가가 작업계획서를 쓰는 과정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경험을 하며 생기는 변수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죠. 문화예술교육도 대부분 그렇게 진행됩니다. 하지만 잘못 이야기하면 아이들의 의견을 무조건 반영하자는 논리로 흐를 수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수업이 끝나면 기계적으로 하는 만족도 조사 결과만을 보고 해석하는 것은 맥락에 대한 단편적 이해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반영해서 수업 설계를 해야 된다고 하는데, 아이들의 의견은 단순합니다. 재밌거나, 재미없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왜 재미있는지, 재미없는지 선생님은 느낌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걸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죠. 자꾸 시스템을 만들다보니 덫에 빠져서 본질을 못 보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까 김경옥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제도 교육의 경직된 부분은 저도 고민이 됩니다. 제가 한 많은 이야기들을 교육이라는 틀에 맞추면 다 깨집니다. 사회에서 하고 있는 건 어떻게 보면 교육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경험도 교육이겠지만, 경험을 교육이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김경옥  

     

     자신의 경험을 의미화 하는 과정에 이르는 것이 교육인 것이죠. 

    정민룡  

     

     학교에서 안하는 것을 하면 됩니다. ‘사회에서의 경험이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안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학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학교에서 하면 됩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역할을 해주는 거고 그게 저는 ‘마을’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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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하고 ‘협력’하는 법을 배우는 문화예술교육

    김경옥  

     

     학교에서 하지 않는 것의 본질을 꿰뚫어봐야 합니다. 학교에서 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것이 ‘질문’입니다. 본질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질문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학교 밖의 교육에서는 똑같이 피리를 부는 체험을 하더라도 질문을 통해 아이들이 다양한 층위의 경험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학교안에서는 ‘협력’을 잘 안 합니다. 적(敵)이 되어야 살아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시시때때로 적이 되어야 하고, 협력하면 무너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밖에서는 무엇을 경험하더라도 협력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선생님들은 ‘무언가를 잘하게 할까?’가 아니라 학교에서 경험할 수 없는 ‘무엇을 하게 해줄까?’에 질문하고 답을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영직  

     

     올해 처음으로 서울시 50플러스 서북캠퍼스 인생학교 과정에 참여했는데 느낀 바가 꽤 많습니다. 만 50-64세 연령대의 성인들이 모여 동아리 만들기를 비롯해 다양한 활동을 하시는데 이분들이 한 목소리로 ‘커뮤니티 활동’이 가장 좋았고, 이를 통해 가장 많이 배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이들, 성인들 할 것 없이 질문을 하고 협력하는 것은 동료를 믿고 함께 가는 힘이 아닌가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와 제안들을 부탁드립니다. 

    정민룡 

     

     경험을 재구성하게 해주는 것인데요, 문화예술교육에서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경험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모험의 요소를 상상하자면, 어릴 때처럼 산을 타고 멀리 가는 경험을 아이들이 하면 좋은데 이를 위해 환경을 일부러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아이들과 시간을 정하고 새로운 경험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안 해본 생경한 경험을 하게 해준다는 약속, 거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어떤 경험을 줄 것인가, 이것이 내용이 되는 것이고요. 경험을 어떻게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조직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면, 일상적으로 만나던 사람도 새로운 사람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죠. 동네 사람도 마찬가지고 예술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미 있는 경험만 있다면 이것이 예술인지 아닌지의 구분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고영직  

     

     광주 북구문화의집과 대인시장에서 박문종 선생님께서 아이들 혹은 성인들과 함께 수업을 계속 해오셨는데요, 수업이 참 독특하더라고요. 그 이야기 좀 해주세요. 

    정민룡  

     

     그분은 교육자는 아니지만, 자기 예술에 대해 ‘예술적인 옹알이’를 하는 분입니다. 아이들은 그 옹알이를 듣고 있다가 배우기도 하고 따라 하기도 합니다.

    오명숙  

     

     미술관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보면, 재료가 풍부해진 것은 분명히 맞습니다. 재료 선택의 범위가 무척 넓어졌지만, 지금 말씀하신 그 예술적 옹알이가 없습니다. 엄마와 아빠, 어린 아이가 오는데 이것저것 재료를 주워 형체를 만들어보는 것으로 활동이 끝납니다. 예술이, 예술가가, 어떤 사고를 하는지를 알려면 그런 예술적 옹알이가 중요한데 아무도 그것을 공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옹알이가 확대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김경옥  

     

     저는 문화예술교육을 하시는 분들이 두 유형으로 분류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옹알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기능적 측면을 강조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티스트들은 예술적 옹알이를 공유하실 것이고, 교육자로서의 성향이 강한 사람은 또 다르게 접근하실 것 같습니다. 그 모든 것을 열어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민룡  

     

     네, 열어놓고 봐야 하는데 90%는 교육을 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분명한 것은 환경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술가의 옹알이에는 모든 철학, 세계가 다 들어 있지만 아이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겠죠. 그런데 이것이 일정 기간을 두고 반복되어 다른 느낌이 만들어지면, 아이들은 저절로 알게 됩니다. 강요가 아닌 것이죠. 예술적 행위를 하고 아이들이 예술가의 옹알이에 동참하면서 그 옹알이를 공유하게 되는 것이죠.

    백용성 

     

     ‘어떤 경험이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개념적으로 말씀 드리면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사실은 이미 서구에서는 ‘경험을 잃어버리고 체험만 남았다’는 문제의식들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경험은 잘 정리되어야 개념입니다. 체험학습과의 차이도 있고요. 어떤 시간을 연습하는 것인데 모든 게 경험이라면 수학 문제를 풀어도 경험이죠. 답이 맞으면 놀라운 경험이고요. 저는 문화예술교육의 경쟁자는 학교 교육이 아니라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마트폰과 대결해 이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학생들이 학교 교육을 벗어나는 순간 선택지는 모두 그쪽입니다. 왜냐하면 게임은 대게 왜곡된 경험이지만 짜릿한 ‘체험’을 주거든요. 킬링 타임이죠. 삶을 죽이는 거죠. 거기엔 참된 의미의 경험이 없어요. 스마트폰도 물론 경험을 줍니다. 학교 자체는 아쉽게도 스트레스가 많은 공간이 되어 아이들이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게임 쪽으로 벗어나게 되는 환경인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아이들에게 좋은 의미의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나갈 것인가 하는 과제가 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서는 학교 자체도 이런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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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움이 일어나는 경험은 어떻게 오는가

    고영직 

     

     ‘체험에서 경험으로’라는 주제는 아마 《지지봄봄》 다음호에서 주로 다뤄질 것 같습니다. 제 경험을 하나 말씀 드리죠. 작년에 전라남도 장흥에서 진행되는 인문캠프에 참여했는데요, 저녁 때 20명의 청소년들을 앉혀놓고 글을 쓰게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낮에 열린 <정남진장흥물축제>에서 신나게 놀았던 터라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전지 한 장씩 나눠주고 밖에 나가 ‘드러눕기의 기술’을 배우자고 제안했고, 땅바닥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보게 했습니다. 잠을 자도 좋고 멍때려도 좋은데 옆 친구와 이야기는 하지 말고 스마트폰도 하지 말자고 주문했습니다. 그랬더니 참여한 스무 명의 아이들 중에서 꽤 많은 아이들이 ‘그 순간’이 가장 좋았다고 답했습니다. 저는 그게 일종의 경험이 되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하나의 경험을 겪은 것이죠. 특정한 상황의 특정한 경험, 존 듀이 식으로 말하자면 ‘어떤 하나의 경험(An Experience)’을 겪었달까요. 그런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예술적 옹알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수업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요, 현장의 문화예술교육자들이 질적으로 성숙된 교육을 위해 어떤 고민과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명숙  

     

     제가 추진 중인 일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경복궁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요. 그런데 경복궁 복원만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총독부 건물이 분명히 있었고, 정부종합청사로도 썼었는데, 그 터에는 표지석조차 설치하지 않습니다. 이유를 물어봤더니 ‘여론이 겁나서 못하겠다. 자신이 없다’라는 답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역사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 과거에 이러한 일들이 있었으니 잊지 말고 생각해볼 지점을 만들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현실을 간과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맥락’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인간이 성숙해진다고 봅니다. 삶이 어떻게 좋은 것만 있을 수 있겠어요. 불행한 일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달리 쓰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맥락에서 다뤄야 합니다. 푸코 이야기도 하셨지만, 푸코가 설계한 근대의 감옥에 사는 우리 몸이 현실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영직  

     

     올해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에서 주관하는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사업에서 주성진 선생님을 중심으로 ‘수업비평’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지원 선생님께서 간략히 설명해 주시죠. 

    최지원 

     

     지원사업에서 모니터링이란 이름으로 매년 현장에 나가는데 이것이 결국 예산이나 시간의 한계 때문에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잠깐 동안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면 이것이 공유가 안 되는데, 결국은 모니터링이든 컨설팅이든 수업을 하는 선생님이나 기획자가 스스로의 고민에 대한 깨달음과 경험의 지점이 있어야 수업이 질적으로 성숙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올해 영상비평 모니터링을 시작했습니다. 기본은 수업 영상을 전부 찍은 뒤 같이 보고 수업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이야기를 나눠보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수요 조사를 했는데 8개 정도의 단체가 신청했습니다. 수업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예술교육자와 단체의 거부감을 예상했으나 의외로 현장 반응이 좋았습니다. 신청 단체 중 3-4개 단체와 올해 진행할 것 같습니다. 

    고영직 

     

     작년에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사업에서도 역량강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여러 사람들이 수업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안양문화예술재단과 함께한 사업으로『컨설팅에서 협력―까지』라는 결과 보고서도 나왔습니다. 저는 그때 안산(지아정원)과 이천(설성면주민자치위원회)에 있는 두 단체와 깊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이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을 그때 실감했습니다. 두 팀 중 안산 지아정원의 기획자와 주강사가 제가 사는 동네에 찾아와 고맙다며 같이 술잔을 주고받은 게 기억납니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수업에 대해 읽어주는 비평이 너무나 없습니다. 함께 수업 내용과 형식에 대해 읽어주는 ‘수업비평’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8개 단체가 참여 의사를 밝힌 것은 상당히 고무적입니다. 

    정민룡 

     

     살짝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는데요, 수업을 잘하는 사람은 확실히 있습니다. ‘선수’들이죠. 결국은 수업 기술의 문제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매뉴얼이 있어 수업 분위기를 좋게 하는 거죠. 그러면 또 다시 ‘좋은 수업=진행을 깔끔하게 잘하는 사람’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수업을 쪼개서 파편적으로 접근하게 됩니다. 학교 선생님들도 수업 잘하는 분이 계신가 하면 못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수업 비평이 수업 기술에 대한 진단 위주로 진행된다면 위험요소가 생길 수 있는 것이죠. 
     아까 경험과 관련해서 이야기들이 예술적 경험 중심으로 모아졌는데, 한편으로 저는 놀라운 경험의 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가, 기획자 같은 사람들이 짧은 시간에 놀라운 경험을 하는데 필요한 것을 준비합니다. 이것을 잘 준비하기 위해서 입체적인 작업과 팀워크가 필요합니다. 왜냐면 최대한 번거롭게 준비가 되어야 아이들이 재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집에 대해 경험하고자 한다면 집을 지어야 하지만, 그게 어려우니까 종이로 잘라서 모형을 만듭니다. 아이들은 시시하다고 생각하죠. 전혀 놀랍지 않은 경험입니다. 직접 만들어야 놀라운 경험이 되는데 그 준비는 번거롭고 힘듭니다. 때로는 모래도 나르고 나무도 나르며 여러 가지 일이 생기죠. 그게 문화예술교육이 해야 할 일입니다. 앞으로 선생님들은 그런 부분의 역량도 필요할 것입니다. 아이들을 다루는 솜씨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협력하는 강사와의 협력체계가 더 중요할 수도 있고요. 팀플레이로 가는 것이죠. 비효율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의 고민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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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나브로의 힘’과 히든 커리큘럼

    김경옥  

     

     사례를 하나 말씀드리면, 작년에 <오디세이학교>에 온 남자아이 이야기인데요, ‘An Experience’의 경험이 어느 날 천둥 맞듯이 갑자기 오는 것이 중요한지, 아니면 시나브로 축척되는 것이 중요한지, 이 아이의 사례에 비추어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인간에게 더 중요하게 작동하는 건 ‘시나브로의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 밖의 문화예술교육은 어떤 면에서는 ‘An Experience’를 주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학교 교육 현장은 시나브로의 힘을 믿는 현장이라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면 교사도 지치죠. 당장의 피드백을 못 받더라도 10년 뒤에는 발현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고 빼빼 마르고 무기력의 결정체인 남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저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활동 중 커뮤니티 활동이 있습니다. 10명 남짓한 아이들이 1년에 40회 정도의 활동을 하는데 핵심은 그룹 안에서 일상을 회고하고 그에 대해 나머지 아이들이 피드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두 달이 되어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친구가 잘하는 게 피아노치기인데요, 성적도 좋지 않고, 학교에 있었으면 그냥 열등감 속에서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말도 못하고 표현도 안 되고 잘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한 대 있는 피아노를 틈만 나면 연주했습니다. 그것을 하지 말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요. 이 아이가 피아노를 치면 3-4명의 아이들이 모이고, 어떤 날은 10명까지도 모여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요. 그러던 중 드디어 그 아이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룹미팅 때 ‘네/아니오’만 말하다가 단어가 문장이 되면서, 이 아이가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디세이도 학교도 그만 두고 싶다고 했습니다. “힘드니?”라고 물었더니, ‘못 알아듣는 말 때문에 힘들다. 내 열등감이 해소가 안 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본인은 깨닫지 못했겠지만 자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보면 훌륭해진 것이죠. 그러면서 학교를 그만 두고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엄마가 맥도날드에서 매니저를 하는데 엄마를 보니까 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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