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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구문화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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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삶은 문화다(정상철/광주드림기자)

    • 작성자북구문화의집
    • 등록일09.07.03
    • 조회수4,369


  • 문화는 본래 삶과 다르지 않다. 생활이 있는 곳에서 혹은 가까운 곳에서 문화는 꽃핀다. 문화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끊임없는 애착과 같다. 이 나라의 문화적 확산이 더뎠던 까닭은 문화를 거창한 '무엇'으로 한정시키는 경직된 사고에서 비롯됐다. 자기 안에 문화를 두고, 다른 특정한 곳에서 문화를 찾아 헤맸던 것이다.
    문화중심도시가 논의되면서 광주의 문화를 끌고 가는 물길은 많은 지류를 만들어냈다. 삶 속에서 문화를 찾아내는 기획자들이 등장했고, 기록에 시간이 쌓이면 문화로 변환된다는 특별한 사고의 전환도 만들어졌다. 문을 열고 길을 나서면 발 딛는 곳 모두가 문화의 공간이다.

    길 위에서는 언제나 삶이 피어난다. 뚜렷한 목적을 향해 가는 길이건, 까닭 없이 나선 길이건 상관없다. 길은 언제나 스스로 깊어져서 사람을 기억의 숲으로 이끈다. 길의 깊이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는 곳이 골목이다. 집과 집을 연결하는 골목 속에는 눈물이 잠들고, 사람살이의 흔적들이 곳곳에 박힌다.

    도심의 골목은 아파트와 주택, 가게와 공원을 연결하며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히다가도 어느 순간 사람의 집으로 연결된다. 여기저기 마음대로 뻗은 것처럼 보이는 길도 알고 보면 그 안에 나름의 흐름이 있다. 길의 흐름을 알게되는 순간, 매일 그 길을 밟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된다. 문화의 발견 또한 같은 이치여서 길이 있고, 거기 사람이 있다면 문화는 발견된다.

    최근 몇 년 동안 광주 안에서는 골목 같은 삶의 공간을 통해 혹은 나무의 그늘 같은 쉼의 장소들을 통해 문화를 조명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발견된 어떤 문화는 지금 광주를 풍요롭게 하고, 또 어떤 문화는 거기 있었다는 기록만을 남긴 채 시간의 강으로 졌다. 전자는 '폐선부지'를 예로 들 수 있겠고, 후자로는 아파트 건설을 위해 밀어버린 '학동 8거리'를 예로 언급할 수 있겠다.

    돌아보면 경직된 시선으로는 문화가 아니었던 것들이 지금 문화의 얼굴로 우리 곁에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과 살아내고 있는 시간 그리고 우리 자신들 속에는 문화가 있다. 그 문화적 키워드들을 따라 걷는다.

    생이 열리는 문화센터, 재래시장

    시장은 무형의 문화가 굳어있는 화석이다. 어림 잡아도 그곳에서 상호 교환됐던 목적 문화는 여럿이다. 생필품 교환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목적이 있었고 사람과 사람을 장소로써 연결하는 사랑방의 역할도 했다. 돌고 도는 풍문이 그곳에 모두 집결해 소식이 됐으니 요즘 말로 하면 󰡐뉴스센터󰡑의 기능도 했다. 역사를 바꾼 비밀결사의 장소로 시장이 자주 언급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이 나라에 현재와 같은 오일장 형태의 시장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470년이며 그 땅은 무안이었다. 그 이전까지의 장은 한 달에 한 번 혹은 보름에 한 번씩 열리는 형태였고 기껏 물물교환의 장소였다. 그때 삼남에 흉년이 들었다. 먹을 것조차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 살기 위해 남는 것을 팔아 부족한 것을 사는 물물교역소 형태의 시장이 무안에 전국 최초로 생겼다. 무안에서 처음 생긴 오일장은 나주를 거쳐 전라도, 경상도, 삼남을 거쳐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광주의 최초 오일장은 광주천변 둔치에 있었다. 정확한 형성시기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17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둔치는 공유지의 개념이 강하고, 지형이 평탄하며 장이 설만한 넓은 땅을 가졌다. 광주천변의 장은 큰장(공수방장, 읍대시)과 작은장(부동당장, 읍소시)으로 분화돼 열렸다. 큰장은 2,7장이며 작은장은 4,9장이다. 조선시대 규모가 큰 고을의 오일장들은 대부분 이런 형태를 취했고, 10일에 4번 열리는 구조였다.

    광주천변의 장은 1920년대 일제가 광주천 직강하 사업을 하면서 지금의 광주공원이 있는 사동으로 옮겼다. 그러나 장이 이전처럼 번성하지는 않았다. 광주공원에 신사가 하나 있었는데 조선총통부가 직접 관할하는 규모가 큰 신사였다. 신사로 인해 조선인들은 사동으로 옮긴 시장 출입을 꺼렸다. 이후 1940년대 초반 현재의 금호맨션이 있는 곳으로 잠깐 옮겼다가 40년대 중반 현재의 양동시장 자리로 옮겼다. 양동시장이 거대 규모의 시장이 됐던 것은 해방 이후이고 한강 이남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시장이었다.

    현재 광주에 현존하는 시장으로 가장 오래된 장은 비아장이다. 250년 정도의 역사를 간직한다. 비아장은 원래 장성 남면과 진원면의 경계에 있었다. 원래 이름은 '신거무장'이었다. 비아장과 역사가 비슷한 장으로 송정리 5일 시장을 들 수 있다. 그 장이 현재의 장터로 옮겨온 것은 1914년 호남선이 개통한 다음이다. 원래는 지금의 호남대 근처에 있었으며 장의 이름은 󰡐서남장󰡑이다. 그 근처와 나루터 서남역이 있어 그곳을 기반으로 250년 전부터 장이 형성됐다가 호남선 개통이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대인, 무등, 서방, 남광주 등 다른 재래시장들은 모두 해방 이후에 생긴 장들이다.

    도시 자본과 쇼핑의 편안함 등으로 무장한 대형마트와 백화점들의 광주 진출로 인해 현재 재래시장은 몰락의 직전에 와 있다. 남구의 무등시장, 북구의 서방시장, 동구의 대인시장 등은 시장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이며 그나마 양동시장과 남광주시장, 광산구의 송정시장이 체면을 차리고 있는 정도다.

     문화의 폐기처분, 학동8거리

    불과 1년 전까지 광주에는 팔거리가 있었다. 동네 한가운데로 들어가면 광장이 있고, 이 광장에 서면 여덟 갈래의 방사선 모양으로 골목들이 뻗어 있다. 학동 팔거리다. 그곳은 광주의 역사가 어떻게 문화와 접목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공간이다.

    학동 팔거리는 1920~30년대 광주천 정비로 만들어졌다. 당신 광주천에는 도시의 빈민들이 살고 있었다. 일제는 광주천의 정비를 위해 그들을 내쫓아야 했다. 일제는 빈민들을 일종의 바이러스로 취급했다. 마을 이름을 `갱생부락󰡑으로 지었다. 이탈을 막기 위해 감시자로 `방면위원󰡑도 배치했다. 그곳이 바로 학동 팔거리다. 여덟 갈래의 길을 둔 건물의 배치는 감시에 용이한 감옥을 본 딴 것이다. 일종의 판옵티콘이었던 것이다.

    <팔거리는 광주는 물론 한국근대도시의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겐 주목할 가치가 큰 곳이다. 일제 때 방사선 형태로 도시계획을 한 사례는 국내에서도 몇 군데서 발견된다. 그러나 학동 팔거리처럼 동네 전체를, 그것도 가장 완벽한 방사선 형태로 조성한 사례는 없다. 더욱이 그것이 식민지시대 조선 사람들의 삶을 밑바닥까지 감옥으로 만들려 했던 일제의 폭압을 극명하게 드러낸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적지 않다.> (조광철 '학동 팔거리' 중)

    독특한 공간이니 만큼 팔거리 골목 곳곳에서는 독특한 삶의 문화들이 생겨났다. 󰡒이녘 자석들하고보다 좋게 살제. 여그(유산각)서 모타서 있다가 음석도 갖다 노나 먹고 두런두런 얘기도 하고…. 없는 게 숭이제, 인심이 좋아 여그가. 지금은 사라진 팔거리의 주민들은 팔거리 유산각을  '전망대'라 불렀다. 거기 앉으면 주민들 살이가 훤히 내다보인다는 의미이다. 문만 열면 닿는 곳에 삶을 마주하고 살았던 팔거리 주민들은 인정이 많았다. 마을의 탄생은 비참했지만 삶 속에서 빛나는 문화를 건져냈고, 시간을 기억하는 땅이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학동 팔거리는 세상에 없다. 앞으로도 우리의 기억에만 남아있을 것이다. 팔거리는 지금 포크레인 삽날에 밀렸고, 2010년까지 800여 세대의 아파트로 변모할 예정이다. 개발의 미명으로 삶의 문화를 폐기처분한 셈이다.

    폐선부지

    길을 통해 사람이, 물품이 모이고 만난다. 얘기도 오가고, 물품도 교환된다. 그렇게 길은 인간의 삶,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대규모의 사람이 이동할 수 있는 기차와 그것이 다니는 길의 등장은 도시화로 연결됐다. 광주 역시 기차역을 중심으로 사람이 북적였고 물물교환이 이뤄졌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기찻길들은 없어지기도 했고, 다른 곳에 새로 생기기도 했다.

    기차가 떠나고 광주는 푸른길을 얻었다. 광주역에서 출발해 남광주역을 지나 효천역에 이르는 폐선부지 푸른길공원은 도심철도가 폐선되고, 그 공간에 나무와 꽃을 심어 얻은 10.8km, 4만여 평의 도심 속 공원이다.

    1999년부터 폐선구간의 활용방안을 놓고 논란이 분분했다.  '푸른길 조성'과  '경전철 건설'이라는 양론이 첨예한 대립을 펼쳤다. 결국 시민들은 푸른길을 택했다. 폐선을 푸른길로 만드는 작업은 또 다른 문화를 만드는 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과정을 세세히 기록했다. 누구나 철길과 철길 주변이 광주 근대의 땅이라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그곳의 과거는 어떠했고, 현재는 어떤 모습인지 조사된 적은 없었다. 푸른길의 뿌리인 광주 근대 현장에 대한 탐구가 없었던 것이다.

    문화를 만드는 사람들(푸른길가꾸기운동본부)은 실행파일을 돌렸다. 기찻길 답사팀은 폐선된 구간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세세히 기록했다. 영상으로 담았고, 답사를 함께 했던 정선휘 화가의 그림을 그렸다. 전남대 전남대 조경학과 조동범 교수도 푸른길 주변의 다양한 나무, 풀, 건축물들을 기록했다. 그 결과물들을 모아 2008년 2월 '기차가 돌아왔다'전이 열렸다.

    <현재, 광주 사람들 중 푸른길을 과거에 기차가 다녔던 길 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성장, 개발의 가치가 중요시되는 흐름, 그리고 도시에서 과거라는 것은 굳이 기억하고 찾아낼 필요가 없는 것일지 모르겠다… 광주의 근대 역사는 기찻길 주변에서 시작됐다. 서민들의 희로애락을 함께 한 공간이 그곳이었다. 기차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했고 공부하는 게 어렵기도 했지만 주인집에, 세 들어 사는 집에, 대여섯 명의 하숙생까지, 그렇게 한 집에 여러 식구가 모여 저녁에는 복닥복닥 전도 부쳐먹고 가족처럼 서로를 챙겼다. 폐선의 길에는 그런 '가까운 옛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살고 있었고, 골목길이 남아 있었고, 허름하지만 옆집을 배려하며 같은 높이로 서 있는 집들이 남아 있었다. 지금 우리가 잊고 사는 그 무엇, 혹은 잃지 말아야 할 그 무엇을 시민들이 전시를 통해 찾아보는 시간이 되었음 한다> ('전시의 글' 중)

    그들은 폐선부지 구간,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했다. 길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건축물들에서, 광주의 과거 모습은 남아 있었고, 일부 구간은 푸른길 조성으로 인해 과거 우리가 이웃과 부대끼며 살았던 것처럼 공동체가 살아나고 있었다. 폐선길을 되돌아보는 문화적 시도가 없었다면 자칫 묻혀질 수도 있었을 삶의 모습들이다.

    아파트에서도 문화가 핀다, 문화유랑단

    아름다운 아파트가 있다. 화정동 다섯 개 아파트들이 모여 꿈꾸는 문화공동체 󰡐광주문화유랑단󰡑. 화정동의 라인동산, 태영, 현대, 금호, 대림아파트 사람들은 2005년 유쾌한 음모를 꾸몄다. 아이들의 '공동 돌봄'과 문화답사, 동네신문 만들기를 통해 문화가 살아있는 아파트를 만든 것이다.

    문화유랑단은 생활 속에서 문화를 만들었다. 그들은 인정이 살아있는 따뜻한 동네를 꿈꿨다. 이웃 아이들을 같이 보살피고 교육하는 공동 돌봄 '꽃피는 학당'이 그 시초다. 매주 목요일 오후 5시면 어김없이 동네 아이들 20명이 모여 한자공부와 문화예술교육을 진행한다. 강사는 동네의 주민이고 강사비는 없다. 일종의 마을 학교다. 학당이 열리는 날이면 부모들이 자발적으로 고구마나 삶은 계란을 가져와 간식으로 나눈다.

    자기 안의 생각들을 외부와 함께 소통하기 위해 화정동 동네신문 '화정동에 꽃이 피다'도 만들어냈다. 40페이지로 구성된 신문의 편집위원은 아이들과 동네주민 10여 명으로 구성됐다. 유랑단 문화답사 활동과 아파트 사랑방의 풍경들, 아이들의 고민과 꿈을 신문 속에 담았다. 신문은 생각의 아름다운 확산이었다.

    답사도 진행한다. 문화유랑단은 2007년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추진단 시민문화서포터즈가 진행하는 광주문화유산답사를 함께 하면서 더욱 큰 힘을 얻었다. 처음으로 떠났던 곳은 임곡의 월봉서원과 요월정, 고봉 기대승의 사상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충효동 일대 풍암정사와 담양의 명옥헌 등 사림문화와 호남의 풍류을 느끼기도 했다. 무등산 춘설차밭과 의재미술관도 다녀왔다.

    한 달에 한 번은 정기적인 답사와 문화체험을 실시한다. 그냥 돌아보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함께 그리고 사진을 찍어 표현하고 글을 쓴다. 광주의 정신을 직접 체험하고 받아들인 것을 표출해 문화의 틀로 구현하는 교육이다. 그 과정 속에서 타인이었던 아파트 사람들이 이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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